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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뭉크는 왜 절규했을까

2020.04.21

 

그가 애착한 작품  :  절규

 

 


 

 

좌) '나 홀로 집에', 우) '스크림'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영화 '나 홀로 집에'와 공포영화로 유명한 '스크림'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두 영화 모두 미국 영화로 1편이 90년대에 나왔다. 매우 크게 성공을 했고 여세를 몰아 시리즈물로도 제작되었다. 후속작들까지 인기를 이어갔는데 2000년대까지 시리즈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 바로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려 '절규'하는 표정은 빼놓을 수 없는 두 영화의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영화 '나 홀로 집'에서 주인공 케빈의 표정은 포스터에도 담길 만큼 영화의 대표 이미지이다. 

도둑들을 만나서 깜짝 놀랄 때마다 위의 표정과 동작을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사진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까지 든다. 이후 제작된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바뀌어도 케빈의 절규하는 표정과 동작은 동일하게 이어졌다. 이와는 다르게 영화 '스크림'에서는 악당이 절규하는 표정의 가면을 쓴다. 그 인물이 살인마라는 설정이 더해지면서 영화 속의 공포를 조장했다. 겁에 질린 주인공들의 뒤로 스크림의 가면이 등장하면, 보는 관객들까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무섭게 등장한다. 스크림의 가면은 전 세계의 할로윈에서 등장할 만큼 아직도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절규'를 하는 이 표정은 언제 이렇게 이미지로 등장했을까. 

두 포스터를 보면 미술 교과서의 단골 손님인 한 작품이 연상된다. 이 작품의 등장은 두 영화가 제작되기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늘날 영화뿐만 아니라 여러 패러디를 만든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예술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와 그의 대표작 < 절규(The Screem) >이다.

 

 

 

 

절규(The Screem, 1893)

 

 

 

 

<절규>의 초기 이름은 뭉크가 붙였던 <자연의 절규>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남동쪽에 위치한 에케베르그 언덕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절규는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질려버린 듯한 얼굴, 커진 눈과 콧구멍입의 표정은 해골처럼 기괴스럽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스러움을 주는 얼굴은, 목청껏 길게 지른 비명을 들리게끔 한다. 동작은 나 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놀라서 얼굴을 부여잡는 것 같기도 하고, 귀를 막는듯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어지러운 배경과 자극적인 색감에 비해 작품 속 화자의 옷은 저승사자처럼 새까맣다. 

 

마치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표정과 동작은, 왜 이 작품이 '절규'인지 알게 한다.

 

그림 속 배경을 보면 주인공은 다리 위에 서있는 듯하다. 다리 뒤에 보이는 푸른색은 동산과 강물 등 명확한 형체를 알 수 없다. 파란 소용돌이를 일으켜 거센 파도까지 연상시키는데, 마치 저 멀리 있는 배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하늘의 색은 섬뜩하게도 붉은 핏빛에 가깝다. 뒤로 걸어오는 듯한 두 인물은 이러한 배경의 느낌 탓인지 귀신이나 저승사자 같다. 만약 그들이 저승사자라면 그림 속의 화자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절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절규(The Screem, 1893)의 확대

 

 

 

 

이 작품은 확대해서 보면 더 흥미롭다. 공포가 더 살아나면서도 동시에 무서움 대신 작품 속의 여유가 보이기도 한다. 

 

저승사자 같던 두 인물은 확대해서 보니 화자의 절규와는 관계가 없는 듯 여유롭다. 저 멀리 항해하는 배는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듯 평화로워 보이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어느덧 붉은 하늘은 그저 하루를 보내는 노을이 되어있었다. 마치 화자의 절규가 홀로 외롭게 지르는 망상처럼 느껴진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 질 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을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1892년 1월 뭉크

 

 

 

 

 

자화상 (Self-Portrait, 1881-1882)

 

 

 

 

에드바르트 뭉크는 평생을 공포와 망상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자화상 속의 그는 18살로 추정된 나이임에도 경계와 긴장을 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외로움과 고독, 불안과 망상, 그리고 공포는 그에게 명성을 주었다. 미술사적으로 그는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준 예술가로 불린다.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을 떠난 후 이름이 알려진 것에 반해, 그의 예술에 대한 철학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생전 유명세를 누렸다. 

 

1863년 어느 추운 겨울, 뭉크는 노르웨이 남부의 작은 마을 농장에서 다섯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와 누나는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서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러나 뭉크는 생을 알기도 전에 죽음을 먼저 알았다. 그의 나이 5살, 허약했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4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여동생은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아버지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뭉크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도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만에 죽었다니, 그의 불안은 너무 일찍 알아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시작으로, 이후에는 여성에 대한 증오와 기피로 연결된다.

 

 

 

 

 

 

 

좌) 병든아이(Sick Child, 1885~1926), 우)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1893)

 

 

 

 

 

 

이렇게 경험을 담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뭉크의 작품에 주 소재로 등장한다.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병약함과 정신병이다'라고 회상했을 만큼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자기 스스로의 약한 정신상태를 잘 알았다. 그런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며 신경질적이고 광적으로 자식들을 대했다. 예민했던 뭉크는 종종 악몽을 꾸거나 환상을 보았는데, 훗날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이렇게 가족의 죽음과  불안정했던 환경,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서 중요한 소재가 된다.

 

 

뭉크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안정감이었다. 그러나 사랑마저도 그에게는 평범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팜므파탈로 유명한 여성과 빠진 첫 번째 사랑은,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러하듯 실패하였다. 뭉크는 집착과 질투로 이어진 큰 고통에 힘들어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사랑을 하게 되는데, 뭉크에게 집착했던 여성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다시금 느꼈다. 당시 그녀의 끈질긴 결혼 요구에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이에 그녀는 뭉크를 권총으로 위협했고, 총알이 뭉크의 왼손가락 중지를 관통하면서 둘의 사이도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이는 그에게 여성이란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상을 주는데, 여성을 장미로 비유하며 '장미의 가시가 고통스럽듯, 여성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실망할 일이 없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뭉크에게 사랑이란 정서적 교감과 안정감을 주는 대상이 아닌 집착과 위협,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 남았고 이는 더 큰 피해망상으로 다가왔다.

 

 

 

 

좌) 흡혈귀 (Vampire, 1893), 우) 살인녀 (The Murderess, 1906)

 

 

 

 

 

뭉크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쏟았다. 

 

그는 신화적인 요소나 자연 풍경을 그리는 다른 화가들에 비해 내면세계를 담았는데, 이는 그가 떠났던 파리 여행이 영향을 주었다. 뭉크가 신진 작가였던 시절, 당시 젊은 작가를 후원하는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가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 덕분에 뭉크는 3주간 파리를 여행하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에 영감을 받게 된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작품 속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키는 것을 고민하던 뭉크는, ''와 '경험', 그리고 그걸 담아내는 '내면세계'를 작품에 쏟아낸다.

 

1892년, 베를린 미술가협회의 초청으로 뭉크는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그의 작품은 독일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죽음이 담긴 폭력적인 이미지가 당시 보수적인 언론으로부터 강한 비방이 담긴 혹평을 받은 것이다. 

 

개인전을 지속할지 여부를 두고 협회의 찬반 표결이 벌어졌고, 8일 만에 전시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뭉크 스캔들((Munch Affair)’로 불려지며 뭉크를 유명하게 만든다. 덕분에 여러 베를린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은 그는 4년을 더 베를린에서 머물게 된다. 이때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뭉크의 <절규(1893)>가 선보이게 되었다.

 

 

 

 

좌) 초기 작품, 우)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유화작품

 

 

 

왼쪽은 1893년 파스텔로 판지에 그려진 초기 버전이며, 오른쪽은 같은 해에 유화, 템페라, 파스텔로 판지에 그려진 가장 많이 알려진 버전이다. 

뭉크의 전성기 초입에 제작된 <절규>는 '생의 공포'를 표현했다.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그렸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죽음을 비롯해 다양한 감정까지 느끼게 한다.

 

 

뭉크의 삶을 바라본 후 다시 마주한 <절규>는 그의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성격을 담긴 듯하다. 한 생에 거쳐서 그에게 압박처럼 다가온 불안과 공포에 대한 울부짖음을 작품에 표현했다. 왼쪽의 초기 버전을 보면 전체적인 구도는 오른쪽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뒤에 있는 두 인물의 시선이 달라진 부분과, 배가 초기 버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붉은 하늘의 강렬함은 유화에서 더 극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선의 방향도 일관된 느낌으로 바뀌면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했다. 이렇게 뭉크는 절규하는 한 남성과 그의 심리를 담은 요동치는 배경을 담았다. 더 나아가 작품을 통해 현대인들의 경악하는 모습까지 담아냈다.

 

 

 

 

 

 

<절규> 연작

 

 

뭉크는 <절규>에 애착이 많았다. 

 

이후 50여 점의 다양한 매체로 제작했다고 알려졌으며, 현재에는 서두의 유화작품을 포함해 총 4점의 연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본 <절규>는 노르웨이의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작품이다. 그는 생전에 18,000여 점의 판화 작품을 제작했을 만큼 회화와 판화작업을 병행했는데, <절규>도 1895년 석판으로 제작했다. 위의 가운데 작품은 같은 해에 판지에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2년 소더비(Sotheby's)에서 약 1억 200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 작품은 1910년 템페라로 판지에 그려졌다. 2004년 뭉크 박물관에서 도난당했다가 2006년에 되찾은 작품이기도 하다.

 

 

 

 

 

@The New York Times, February 13, 1994, Section 1, Page 3

 

 

뭉크의 작품은 지난 칼럼에서 기재했던 '미술작품 도난'과 연관되어 있다.

 

1994년,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서 뭉크의 유화 버전이 사라졌다. 당시 훔쳐간 그들은 '빈약한 보안에 감사하다(Thanks for the poor security)'라는 메모를 남겨놓았는데, 다행히도 3개월 뒤에 경찰의 함정수사에 덜미가 잡히게 된다. 작품은 손상되지 않은 채 돌아왔으며 현재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서 다시 소장 중이다. 

 

2004년에는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다른 도난사건들이 주로 밤과 새벽에 일어났던 것에 비해 이 사건은 낮에 무장강도의 난입으로 발생한다. 그들은 관람객들을 위협한 후 템페라 버전의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으며, 2006년에 경찰의 수사로 되찾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작품 모두 약간의 손상을 입었다.

 

 

 

<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Between the Clock and the Bed, 1940~1943) >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살았던 뭉크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다른 화가들에 비해 장수했다. 살아생전 유명세를 누렸던 그는 70세에 노르웨이 정부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각각 훈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말년이 마냥 편하지만은 못했다. 1937년 나치 정부에 의해 그림이 압수당했으며, 작업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울 만큼 시력을 거의 다 잃어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업한 작품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부터 그렸던 <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이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유언을 통해 오슬로 시에 기증되었다.

 

 

<절규>의 역동적인 곡선은 1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생전 그가 피하고 싶어했던 고통은, 비명을 지르는 인물이 되어서 그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뭉크는 약 2만 점이 넘는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렇듯 그의 좌절과 고통, 불안과 공포를 담은 작품들은 오늘날 우리와 21세기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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