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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예술로 고발한 전쟁의 잔혹함

2020.08.09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병사가 되면 장군이 될 것이고, 

신부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화가가 되었고, 마침내 피카소가 되었다. ”
 

 

 -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20세기 최고의 거장이자 입체파를 창시한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

 

 

 

화가가 되자 '피카소'가 되었다는 그의 당당한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고, 그가 창시한 입체파는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천부적인 재능의 예술가 피카소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린 작품이 있다. 이제 그 작품은 평화의 상징으로 남아서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881년 10월,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천재 예술가 피카소가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로스 레메디오스 크리스피니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rispin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으로 줄이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이다. 그를 파블로 루이스로 불러야 하나, 그가 19살 때 어머니의 성인 '피카소'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로 알려지게 된다. 

 

 

 

 

 

 

 

 

 

 

파블로 피카소 , 1896

 

 

 

 

 

 

 

 

그는 말보다 그림을 먼저 그렸다고 알려질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피카소 스스로도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라고 할 정도로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학교에 보냈는데, 그는 경직된 미술수업이 싫어서 학교를 자주 빠졌고 결국 집을 나와서 파리로 떠났다. 

 

 

 

 

 

 

 

 

 

 

좌) <비극(The Tragedy)>, 중) <파이프를 든 소년(A boy with pipe)>, 우) <아비뇽의 처녀들(The girls of Avignon)>

 

 

 

 

 

 

 

당시 파리는 미술의 중심지였다. 피카소는 그곳에서 옛 대가들의 작품을 마주하고,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우울하고 고난했던 시절에는 푸른색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사랑에 빠졌던 마음을 붉은 장밋빛으로 화폭에 옮겼다.

 

 

 

 

그는 작업에만 몰두한 것이 아닌 스스로 마케팅을 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날고 기는 화가들 사이에서 자신을 알리고자, 여러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피카소 그림이 있는지' 묻고 다녔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갤러리들은 피카소가 누군지 궁금해했고, 그의 예술성도 점차 두각을 드러내며 마침내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당시 최고의 화가이자 야수파의 창시자였던 앙리 마티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입체파(큐비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티스와의 만남 이후 그는 원근법과 명암은 무시하고, 오로지 형태에만 집중한 작업방식을 고수했다. 그 형태마저도 위, 아래, 옆면을 모두 담으면서 종이라는 2D위에 3D를 표현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작업방식은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의 입체파는 환영을 받기는커녕, 마티스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과거의 재현이 아닌,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결국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그는 스페인에서 온 화가에서 미술계를 이끄는 중심부의 인물로 우뚝 섰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그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조국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서 나치가 이끄는 독일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마을 인구의 1,6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 그림은 아파트 장식으로 쓰일 것이 아니라 무기가 되어야 한다 ”
 

- 파블로 피카소

 

 

 

 

 

 

 

 

 

 

@The Tragedy of Guernica, Historynet.com

 

 

 

 

 

 

 

 

 

 

1937년의 스페인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내전이 한창이었고, 이를 계기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정권이 시작되었다. 그는 정권을 잡았으나 전력이 약했다.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독일의 나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스페인의 게르니카를 무기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내어주었으며, 평화로운 마을은 영문도 모른 채 4시간 동안 5톤에 달하는 융단폭격을 맞아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마을 인구의 1/3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지만, 많은 유럽 열강들은 나치의 폭주를 막지 않았다. 

 

 

 

 

파리에 있던 피카소는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유럽 열강이 외면한 이 사건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자 게르니카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주어진 시간은 약 50여 일이었다.

 

 

 

 

 

 

 

 

 

 

 

 

 

게르니카 드로잉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대형 벽화로 구상하고, 끊임없는 드로잉을 통해 형태와 색을 고민했다. 게르니카의 드로잉 작품을 보면 비교적 피카소의 의도가 잘 보인다. 화면의 왼쪽에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소가 보이고, 그 아래에는 절규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있다. 마치 유령이 구천을 떠돌듯 몇몇의 인물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그는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공포에 떨며 절규하는 시민들을 그려나갔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는 긴 선이 세모를 이루며 유리의 파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이유도 모른 채 잘려나간 그들의 삶의 모습과도 같았다. 

 

 

 

 

 

여러 고민과 드로잉을 거듭한 끝에 게르니카는 점점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기에 구상했던 색은 흑백으로 변경되었다. 불이 나는 집, 놀란 말, 꽃송이 등 그는 열정을 다해 게르니카를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1937

 

 

 

 

 

 

 

 

 

 

 

가로 775 x 세로 349cm의 이 작품은 사람들을 압도했다.

완성된 게르니카는 파리 국제박람회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 순회전을 돌았는데, 초기 파리 전시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점차 순회전을 통해 매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진실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렇게 작품이 유명해지자 '의미'를 두고 여러 말도 오가기 시작했다.

 

 

 

 

 

 

 

 

 

<게르니카> 부분도 (1)

 

 

 

 

 

 

 

 

 

 

 

여러 평론가들은 좌측의 ‘황소’를 투우사의 깃발을 향해 달려가는 강력한 힘, 즉 폭력적인 독재정권이라고 추측했다. 더 나아가 당시 독재 중인 프랑코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에 반해 옆에 있는 ‘’은 ‘게르니카 시민을 대변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면 소의 혀는 칼이 되어서 황소를 향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황소와 말의 의미에 힘이 실렸다.

 

 

 

 

소의 아래에서 죽은 아이를 붙잡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축 늘어져있으며, 하늘을 원망하듯 어머니는 위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화면 가장 아래에는 칼을 들고 죽은 전사자의 모습도 보인다. 자세히 보니 칼과 함께 꽃을 쥐고 있다.

 

 

 

 

 

 

 

 

 

 

 

 

<게르니카> 부분도 (2)

 

 

 

 

 

 

 

 

 

우측의 그림을 보니 불에 탄 집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마치 유령처럼 절망스러운 얼굴이, 아래에는 절뚝거리며 도망가는 시민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어디에도 피해를 주는 이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은 채, 그저 피해를 받고 있는 무고한 시민들의 모습만 재현되었다. 

 

 

 

 

여러 추측이 오가고 있을 때 피카소는 해석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답을 했다. 소와 말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소는 소이고 말은 말이다'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는 그저 사물 자체를 그리는 것이며, 관람자가 부여한 의미가 맞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은 아니라며 아리송하게 답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가 피카소에게 ' 게르니카를 당신이 그렸냐 '라고 물었을 때 그는 확실하게 답을 했다.

 

 

 

 ' 아니, 이건 당신들이 한 거잖아 '라고.

 

 

 

 

 

 

 

 

@What Makes Guernica Picasso's Most Influential Painting, Artsy

 

 

 

 

 

 

 

 

이후 이 작품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오랜 시간 있었다. 미국의 금융가에서 ‘원하는 만큼 액수를 지불’하겠다며 그림을 사려고 했으나, 그는 조국에 기증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이 작품이 고국으로 돌아간 시기는 그의 유언대로 스페인의 독재가 끝난 뒤였다. 장기독재의 권력자 프랑코가 죽자 스페인으로 옮겨진 것이다. 

 

 

 

 

 

현재 이 작품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있다. 미술관의 통로를 통과하면 이 작품이 벽 한쪽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는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묘한 침묵이 주변을 감돈다. 실제 이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껴진 분위기는 크기와 분위기가 주는 압도감 속에 느껴진 고통, 그리고 아픔이었다. 

 

 

 

 

 

여담으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선포할 당시 게르니카의 모작이 UN에 걸려있었다. 당시 방송에서는 작품의 의미를 의식해서인지, 그 작품을 커튼으로 가리고 앞에서 전쟁을 선포했는데, 오히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작품이 ‘평화’의 상징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그의 뜻대로 그림이 하나의 무기가 된 것이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부른다.

그는 죽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작품이 그를 살아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 덕분에 우리는 평화를 위한 상징과도 같은 이 작품과 동시대를 함께하고 있다. 다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할 아픔을 그가 예술로 고발한 전쟁의 참혹함으로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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