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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아픈 한국사를 닮은 그림

2020.08.15

 

 

 

 

 

 

 

 

기억해야 할 거목, 윤형근 화백

 

 

 

 

 

 

 

 

 


 

 

 

 

 

 

 

 

 

어둡고 짙은 기둥이 나란히 있다.

서있는 건지, 아래로 쏟아지는 건지 알 수 없다.

여백을 뚫고 들어오는 번짐과 여러 번 덧칠한 붓 자국에서 작품의 의미를 유추해본다.

 

 

 

 

 

 

 

 

 

 

윤형근 <청다색 Umber-Blue>, 1976-77 @국립현대미술관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어둠일까, 여백으로 담은 밝음일까.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자 침묵의 화가로 불리는 윤형근 화백(1928~2007)의 <청다색 Umber-Blue>시리즈 중에 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단단하고 아름답다. 실제로 말수가 적었던 침묵의 화가지만, 불의에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던 강인한 화가였다. 한국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맞섰던 한국 미술의 거목, 윤형근. 어지러웠던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소신을 지켜야 했던 한 예술가의 삶을 그림을 통해 바라보자.

 

 

 

 

 

 

 

 

 

 

 

 

 

1989년 작품 `청다색` 연작 앞에서 촬영한 생전 윤형근 화백 @매일경제, PKM갤러리

 

 

 

 

 

 

 

 

 

그는 1928년 충북 청주의 어느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회는 일제 강점기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라가 없던 아픈 시기를 지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까지, 20대가 채 되기도 전에 한국 역사의 현장에서 성장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이 생겼다. 미술에 대한 갈망이 있던 그는 1기로 입학을 했으며, 미래의 장인이 될 김환기 화백(1916~1974)을 스승으로 만났다. 그러나 입학 이듬해 집회에 가담했다가 구류 조치가 되고, 이어서 그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갔다가 목숨을 겨우 건지는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 좋아야 했던 20대 청춘을 울분 속에서 보냈다 ’는 그의 말이 그림과 대비되며 아프게 느껴진다.

 

 

 

 

 

 

 

 

 

 

<제목미상> 1966, @국립현대미술관

 

 

 

 

 

 

 

이후 서울대에는 그를 다시 받지 않았다. 이에 약 10여 년 간을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고, 스승 김환기의 도움으로 1955년 홍익대학교에 편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56년에 전쟁 중 서울에 남아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1960년에 김환기 화백의 장녀와 결혼을 하며 평화를 찾는 듯 했지만 잠시였다. 

 

 

 

 

 

졸업 후 그는 미술 교사로 재직했는데,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학교를 떠나야 했다. 새로 옮긴 숙명여고에서는 당대 최고 권력자인 중앙 정보부장 딸의 부정입학 비리를 목격하고, 침묵 대신 이의를 제기했다가 며칠 후 어처구니없게도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갔다. 그가 즐겨 쓴 모자가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모자와 유사하다는 이유였다. 한 달 만에 석방된 후에도 10년간의 감시가 이어졌다.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던 그는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이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색을 잃었다.

 

 

 

 

 

 

 

 

 

 

<청다색 Brunt Umber & Ultramarine>, 1973 @국립현대미술관

 

 

 

 

 

 

 

 

 

 

 

' 1973년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이야. 처음에는 원색인데 그 위에 자꾸 덧그리니까 까맣게 되고 아예 검게 해 버려야겠다 하고서 울트라마린하고, 번트 엄버를 물 하고 섞은 먹빛으로 그린 거야. 또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그림물감으로 저 큰 데다 어떻게 그리겠어. 그래서 테레빈을 풀어서 묽게 한 거야. 캔버스도 구하기 힘드니까 남대문 시장에 가서 미국부대 사격장에서 쓰는 타켓지와 광목을 사다가 아교를 칠해 썼지요 '

 

 

-윤형근 화백 생전 인터뷰 중

 

 

 

 

 

 

 

 

 

 

 

 

 

그의 초기작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1973년에 그렸던 <청다색 Brunt Umber & Ultramarine> 색의 번짐으로 덧칠한 색이 보인다. 그는 유화물감을 계속해서 덧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반복된 덧칠로 번지는 효과까지 고려했는데, 초기에는 번지는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한지에 그리기도 했다. 

 

 

 

 

 

이후 천을 바탕으로 그렸을 때에도 농도를 생각하며 번지는 효과를 주었고, 그의 작품은 마치 수행하듯 일정한 작업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그의 7,80년대 작품들을 대표작품으로 부른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는 ' 화가 나서 '라고 답했다.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구도는 문(門)이다. ”
 

 

 

-윤형근, 1977년 1월 일기 中

 

 

 

 

 

 

 

 

 

 

 

<청다색 Umber-Blue>, 1977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천지문’이라고 명명했다. 땅을 상징하는 번트 엄버(Burnt Umber)와 하늘을 상징하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을 섞으면 오묘한 빛깔의 검은색이 나왔는데, 두 가지가 나란히 서서 문을 만들어낸다는 뜻이었다.

 

 

 

 

 

그의 문은 강하면서도 심오했다. 손잡이나 어떠한 장식이 없음에도 묵직한 기둥 사이에 있는 문을 통해 관람객들은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혹자의 표현처럼, ' 농부가 밭을 갈듯이 알아주는 이가 없음에도 그는 자신만의 작품을 묵묵히 이어나간 작가 '였다. 은은한 흑과 여백의 대비를 통해 자신만의 문을 계속해서 그렸다.

 

 

 

 

 

문 양쪽의 어두운 기둥은 단순하게 밝음을 대비하는 대상이 아니다. 흙과 돌 같은 자연과 생명의 기반이자, 때로는 채워진 것이 아닌 비워진 대상이 되기도 했다.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김환기 화백에게 받았던 예술적 영감을 점차 그만의 스타일로 구축해나갔다. 그리고 다시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다색 Brunt Umber>, 1980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천지문이 무너져버렸다.

 

 

 

'무너졌다'는 표현이 너무 잘 어울릴 정도로 쓰러지고, 흘러내리며 단단함이 울분으로 바뀌었다.

 

 

 

 

 < 다색 Brunt Umber >을 보면 오묘했던 검은색은 암흑처럼 짙어졌고, 오묘하게 퍼졌던 번짐은 마치 피를 흘리듯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소식을 접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울분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마당에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했는데, 너무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과 스스로의 무력함도 무너지는 기둥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느낌까지 준다.

 

 

 

 

 

 

 

 

 

 

 

<다색 Umber>, 1988-1989 @국립현대미술관

 

 

 

 

 

 

 

 

 

 

이내 그는 파리로 떠났다. 일제 강점기라는 한국의 아픈 역사에도 자신만의 소신을 잃지 않았지만, 더 이상 한국은 그가 견딜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파리로 간 그는 묵묵하게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나가며, 매일 같이 작품활동에 몰두했다. 

 

 

 

 

 

무언가에 몰두하면 점차 주변을 잊고 일에만 집중을 하게 되는데, 그 역시 그랬다. 작업은 그가 가장 그답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자,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창구였으며, 다시 그 스스로를 수련하는 도구였다.

 

 

 

 

 

 

 

 

 

 

 

 

 

 

 

 

 

'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 

 

 

-1990년 일본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에서

 

 

 

 

 

 

 

 

 

 

 

 

 

<청다색 Bru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9 @국립현대미술관

 

 

 

 

 

 

 

 

 

 

 

이후 그의 그림은 단단해지고 건조해졌다. 번짐이 최소화되면서 울분과 분노를 넘어선 그 이상의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 그의 작품을 세계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화가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는 그의 재단을 통해 윤형근 화백의 그림을 구입했다. 윤형근 화백은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더욱더 구축했고, 점차 해외에도 알려지면서 80년대 미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어느덧 그의 작품은 어떠한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는, '윤형근' 그 자체의 단호함과 소신이었다.

 

 

 

 

 

 

 

 

 

 

 

 

 

윤형근 화백(@국립현대미술관)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 속의 모습에서 그의 단호함이 느껴진다.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명의 원인이 된 '레닌 모자'를 직접 쓰고 뒤에는 그와 김환기 화백의 그림 걸었다. 그 사이에서 그는 단호하고도 결심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립 현대미술관의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김환기에서의 출발과 김환기로부터의 결별을 동시에 선언하는 윤형근의 야심 찬 기록 '이라며 사진을 설명했다. 

 

 

 

 

 

 

 

 

 

감동이란 인간사 희비애락(喜悲哀樂)과 같다. 희(喜)는 곧 차원을 뒤집으면 비(悲)가 아닌가? 즉 가장 아름다운 것은 희(喜) 요 곧 비(悲)이다. 

그래서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슬픈가 보다. 

그래서 가장 슬프면 눈물이 나고 가장 기뻐도 눈물이 나오게 마련인가 보다.

 

 


-1980년 7월 5일 윤형근 일기 중

 

 

 

 

 

 

 

 

 

 

 

200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더욱 작업에 열중했다. 2007년 한 해에만 무려 20점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는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경 험한 것을 언급하며, ' 그 이후의 생을 덤 '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덤'으로 얻은 인생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잃지 않았다. 어두워진 그의 색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색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담은 색이었다. 아픈 역사 속에서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던 그의 굵직한 삶과 닮은 이유이다.

 

 

 

 

 

 

 

 

 

 

' 인간이 바로서야 해요.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 

한두 장은 거짓말을 해서 만들 수 있어도 쭉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의 품위가 나타나요.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생전 육성 인터뷰 중

 

 

 

 

 

 

 

 

 

 

 

8월 15일, 선조들의 노력으로 광복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었고, 전쟁과 독재의 아픔에 다시 여러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모 방송에서 역사 교사가 나와서 자신의 소장품을 소개하며 이완용과 안중근 선생을 비교했다. 그는 이완용이 남긴 글자는 아무리 잘 썼어도 몇 십만 원에 거래되지만, 안중근 선생의 글자는 5억 원 이상을 호가한다고 말했다. 역사 속의 진정한 승리자가 안중근 선생인 이유였다.

 

 

 

 

 

그 시절의 윤형근 화백은 매우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와 환경은 그를 더욱 단단해지게 채찍질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의 작품들이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동안 시립미술관에 유치되고, 뉴욕에 있는 갤러리에서는 회고전이 열리는 등 모두가 그를 주목하며 기억한다.

 

 

 

 

 

 

비록 그의 삶이 고되고 힘들었을지라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던 역사 속 승리자 윤형근. 한국 미술사에서도 뺄 수 없는 승리자이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은 아닐지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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