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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많이 들어본 단어, ‘팝 아트’

2020.09.20

 

 

 

 

 

 

 

 

 

팝아트로 표현한 대중미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만화 같은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있고, 복사한 듯 똑같이 찍어낸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유명 작가들이 '팝아티스트'로 불리거나, '제2의 앤디 워홀'처럼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된 예술가도 있다.

 

 

 

 

 

이처럼 팝아트는 현대 미술에서 뺄 수 없으며, 그만큼 많이 여러 미술책과 갤러리에서 언급된다. 과연 팝아트가 무엇이길래 아직까지도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이 제작되고 있으며, 팝아트의 대표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왜 피카소만큼 여러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을까?

 

 

 

 

 

 

팝아트(Pop Art)란 'Popular Art(대중 예술)'의 줄임말로써, 1950년대 영국에서 전조를 보인 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확대된 미술이다. 전쟁을 계기로 예술의 중심지가 프랑스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당시 여러 예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예술 작품들은 전쟁의 상황을 외면하려는 듯 초현실주의가 대세였고, 그들의 이주를 계기로 뉴욕에서 추상 표현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예술활동을 꽃피우자 미국은 고민에 빠진다. 예술의 무대가 미국이지만, 정작 미국은 자신만의 미술이 없었던 것이다. 예술의 중심지이지만, 정작 그 무대에서 즐기는 예술가들이 유럽의 예술가들이니 미국의 숙제는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만들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색하던 중 유럽의 예술가들과는 다른 화가, 잭슨 폴록이 등장했다. 

 

 

 

 

 

 

 

 

 

 

 

 

 

잭슨 폴록의 작업 모습 @Britannica

 

 

 

 

 

 

 

 

 

 

잭슨 폴록은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 아닌,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자유롭게 흘리고 뿌렸다. 마치 '자유'를 상징하는 미국처럼 그의 그림도 매우 자유분방했던 것이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완성된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도 '예술'이라고 불렀다. 자신도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는 우연성에 의해 제작된 작품에 미국은 열광했고, 이러한 그의 회화를 일컫는 '액션 페인팅'은 곧 최초의 미국적 전위미술로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로 대중들이 미국의 미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른 것 이다. 당시 미술은 특정 층에서 즐기고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에 정작 대중들이 이해를 하기 어려웠던 찰나에, 때마침 공산품과 TV의 보급으로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 '팝아트'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팝아트 작품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1922~2011)의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들었는가?>(1956)이다. 그는 최초의 팝아티스트로 대중 소비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조직된 전시에서 이 작품을 선보였다.

 

 

 

 

 

 

 

 

 

 

 

 

 

리처드 해밀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들었는가?>(1956)

@Tyne & Wear Archives & Museums

 

 

 

 

 

 

 

 

 

 

마치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우주 아래에 두 남녀가 있다. 뒤에서 일하는 하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남성과 여성이 보인다. 근육질의 남성은 POP이라고 쓰인 사탕을 들고 있는데, 화면에서 보이는 두 인물은 잡지 속 속옷 광고를 오려서 붙였다고 한다. 몸매 가꾸기에 열중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의 뒤로 보이는 텔레비전과 그 화면에서는 유명 연예인이 보이고, 시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포스터와 그 당시 최고의 자동차 마크도 보인다. 토스트 기계와 커피, 창가의 배경으로 보이는 영화관과 조명은 흑백이지만 충분히 화려한 느낌이다. 화려하고 모두가 부러워할 것 같은 삶 속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앞에 놓인 신문지뿐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완벽하다고 믿는 것들 속에 내재된 물질만능주의를 냉소적으로 생각했으며,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작품에 드러냈다.

 

 

 

 

 

이 작품은 최초의 팝아트 작품이 되었고, 그는 최초의 팝아티스트라 불렸다. 그가 생각했던 팝 아트란, " 대중적이고 덧없으며 확장할 수 있고, 싼 가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허울이 좋은, 매력적인 큰 사업 "이었다. 이후 이 작품은 팝아트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팝아트는 기존의 규범이나 미술에 반대하면서 등장했다. 난해한 추상미술과 지나치게 엄숙한 기존 회화에 대한 조롱과 반발로 시작했으며,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식의 팝아트가 이어지고 있다. 어디에서 볼 수 있는 사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 TV에서 종종 만나는 연예인도 모두 팝아트의 소재이다. 익숙한 소재가 독특한 상상력을 만나서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했으며, 기존 미술과는 다르게 팝아트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미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재는 '만화'도 있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은 어린 아들의 말에 영향을 받아서 만화를 소재로 작품을 제작했고, 이는 곧 그를 미국의 팝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1961)

 

 

 

 

 

 

 

 

 

어느날 평소 디즈니 만화를 즐겨보던 어린 아들은, ' 아빠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없을 거야  '라고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보여줬다. 아들이 내민 것은 풍선껌 포장지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였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주변에서 당연하게 봤던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

 

 

 

 

 

이후 그는 만화의 표현력을 작품에 차용해서 그림을 제작했고, 이는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미술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대중에게 통한 것이었다. 그는 만화적 이미지를 통해 작품을 그 자체로만 선보였고, 자신의 개성이나 의도와 같은 개인적인 견해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1964)과 부분 확대도

 

 

 

 

 

 

 

 

 

 

그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 행복한 눈물 >에도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있다. 한 여성이 기쁜 얼굴을 하고 눈에 눈물이 고인 작품이다. 어떠한 유명인이나 절세 미녀가 아닌, 평범한 여성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작품이다. 단순한 형태와 굵고 선명한 윤곽선, 밝은 원색과 작품을 가득 매운 점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표현했다.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인쇄 기법인 벤데이닷(Ben-Day dot) 기법을 알 수 있는데, 마치 잡지책의 도판처럼 색이 무수히 많은 점으로 채워졌다. 그는 팝아트 작품을 '그림만 봐서는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누구나 똑같이 그린다면 쉽게 맞추기 어려운 작품을 팝아트로 정의한 것이다. 작품의 소재도 어떠한 역사적 의의나 생각을 깊게 하게 되는 의미가 아닌, 당시 유행하고 있거나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삼으면서 대중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 중 너무나도 유명해서 현재에는 작품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앤디 워홀 @위키 백과

 

 

 

 

 

 

 

 

 

미국 팝 아트의 제왕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상업미술을 작품에 도입했으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산품과 TV 속의 유명인들까지 작품 속 소재로 활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열리고,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미국만의 미술에 필요성을 느끼고, 기존의 어려운 미술에 대중이 어렵게 느끼면서 대중문화와 공산품이 확산되고, 이후 팝 아트가 등장하며 누구나 미술을 쉽게 마주했다. 그들의 예술은 대중문화의 바람을 타고 널리 퍼져나갔으며 예술 자체를 넘어서 예술가에 대한 관심도 함께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유명해지길 원했던 앤디 워홀은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며 실제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 앤디 워홀

 

 

 

 

 

 

 

 

 

그는 예술가를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예술가들과는 달랐던 그의 철학은 이내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예술을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제작했다. 그는 주로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했는데, 프린트처럼 단시간 내에 수십 장을 찍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상업적인 포스터를 제작하는데 이용했으며, 오늘날에는 누구나 쉽게 컵과 가방, 옷에 패턴을 인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는 주로 실크스크린을 통해서 작품을 제작했으며 동시에 여러 작품을 찍어내는 그의 작업방식은 그의 유명도만큼이나 많은 이슈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만큼 작품만큼이나 그 스스로가 유명한 아티스트였으며, 그는 밝은 은색의 헤어와 선글라스(또는 안경), 그리고 패션까지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여러 유명인들을 자신의 팩토리에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으며, 유명인을 소재로 한 작업들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앤디 워홀 (1962)

 

 

 

 

 

 

 

 

 

 

 

 

 

그의 작품은 곧 ‘미국스러운’ 작품으로도 통했다. 사람도 공장의 부품처럼 생각되던 그때, 찍어내면서 같은 공산품을 만드는 사회의 모습은 그의 작품과도 닮았다. 그의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이러한 작품들에 대중은 열광했으며 이는 곧 그를 미국의 대표화가 자리에 앉혔다. 

 

 

 

 

 

 

오늘날에도 미술 경매시장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은 위작과, 높은 가격 사이를 오가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전 칼럼에서 소개했던 키스해링과 장 미셀 바스키아도 그와 함께 했으며, 이후 카우스(KAWS)와 같은 여러 팝아티스트들도 앤디 워홀에 빗대어서 표현된다. 팝아트와 현재진행형인 그의 유명세가 땔래야 땔 수 없는 사이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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