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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구한말의 BTS, 기산 김준근

2020.09.25

 

 

 

 

 

 

 

전 세계에서 소장중인 조선화가의 풍속화

 

 

 

 

 

 

 


 

 

 

 

 

 

 

 

 

BTS의 소식에 국내가 한번 더 들썩였다. 국내 가수가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차트에 1위로 등극한 것이다. 어느덧 세계적인 가수로 인정받는 그들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노래와 드라마, 그리고 영화 등 한국의 여러 예술분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떨까? 놀랍게도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장 널리 퍼진 한국화가의 활동 시기가 19세기 말~20세기 초이기 때문이다.

 

 

 

 

 

 

이번 칼럼에서 소개하려는 이는 김환기가 경매 시장에서 100억 원을 돌파하기 전에,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로 세계를 상대하기 전의 인물이다. 이미 그 한참 전에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20개국에 약 1600여 점의 그림이 수출되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아니다. 해외 미술관에서 그림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생소한 화가구한말의 BTS인 기산 김준근이다.

 

 

 

 

 

 

 

 

 

 

 

기산 김준근 <가객창장>,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

 

 

 

 

 

 

 

 

 

 

 

기산 김준근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베일 속 인물이다. 언제 태어났고 세상을 떠났는지, 어떠한 배경과 계기로 그림을 그렸는지, 관련되어 전해지는 일화도 없다. 도화서의 화원도 아니었기에 기록도 물론 남아있지 않다. 오직 그림으로 그를 추측할 뿐이다.

 

 

 

 

 

우선 그는 평민 출신의 화가로 추측된다. 평민 화가로써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조선의 풍속을 들여다봤고 그림으로 옮겼을 것이다. 양반이 아닌 서민의 평범한 일상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눈 속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화폭으로 옮겨졌다.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은 나라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들의 관심은 발길로 이어져 세계 각국에서 항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고,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마치 기념품처럼 조선의 물건들을 사 갔다. 그 중 기산 김준근의 그림은 단연 인기였다.

 

 

 

 

 

 

 

 

 

 

 

 

 

 

 

기산 김준근 <줄타고>,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기산 김준근의 <줄타고>에서는 수염도 채 나지 않은 어린 사내가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으면 좋으련만 휘날리는 옷으로 봐선 바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듯 하다. 얼굴에서 긴장감이 감돌지만, 마치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입을 꾹 다물며 담담하게 걷고 있다. 

 

 

 

 

 

아래에서는 두 명의 남성이 그를 바라보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무덤덤한 건지, 걱정이 되는 건지 그를 올려다보는 장구 치는 사내와 그 앞으로는 춤을 추듯 부채를 들고 양팔을 벌린 사내가 있다. 그들이 신은 신발과 의복에서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지만, 당시 조선의 일상적인 상황과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기산 김준근 좌) <권쟝치고>, 우) <쥴이틀고>,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또한 그는 <권쟝치고>와 <쥴이틀고>처럼 형벌이나 죽은 자를 검시하는 모습, 조선의 장례 풍속도 세세하게 묘사했다. 보통 이와 같은 주제는 쉽게 그림으로 담기 어려울 만큼 당시의 화원들도 꺼렸다. 유독 그의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유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의 주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와 같은 추측은 중국의 사례와도 연관 지을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 중국의 개항기에도 기산 김준근처럼 외국인에게 그림을 파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그림은 '수출화'로 불렸으며, 중국 서민의 삶과 형벌제도 등을 그렸다. 

 

 

 

 

 

신기하게도 기산 김준근 역시 중국의 수출화처럼 이와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며, 마찬가지로 여러 작품을 한 세트로 팔았다. 또한 부산항, 원산항, 제물포항처럼 강화도 조약 이후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개항장(*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해 개방한 제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에 중국 수출화의 사례처럼 외국인들의 요구를 반영해서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기산 김준근 <단오에 산에 올라 그네 타고>, 옛 함부르크민족한박물관 소장

 

 

 

 

 

 

 

 

 

 

 

실제로 그에게 그림을 샀던 이들 중에서는 프랑스의 탐험가 샤를 바라 (Charles Varat)와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W. Shufeld)의 딸도 있었다. 샤를 바라는 조선의 진귀한 물건을 사들였는데 그 중 조선의 풍속을 세세하게 볼 수 있는 기산의 풍속도를 여러 장 샀고, 그 덕분에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서는 약 170여 점의 그의 그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왔던 슈펠트 제독의 딸은 부산 초량으로 내려가서 기산의 풍속도를 샀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오늘날 그의 활동지를 추측하고 있다.

 

 

 

 

 

이렇듯 탐험가와 군인, 외교관, 학자,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김준근의 그림을 통해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풍속과 문화를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 여러 미술관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림들은 단순하게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조선 화가의 그림'을 넘어서 '조선이라는 한 사회와 선조들의 생활 풍습'을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다. 특히 놀이와 형벌에 관한 주제들은 역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해서 소중한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기산 김준근 <농부 밥 먹고> , 옛 함부르크민족한박물관 소장

 

 

 

 

 

 

 

 

 

 

 

그의 그림을 보면 미술의 변화도 볼 수 있는데, 바로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분홍색과 보라색은 오래 전부터 사용된 색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주로 안료를 갈아서 사용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색은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분홍색과 보라색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국내에 서양 안료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는 일반회화나 종교화인 불화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색의 영향을 받아서 고려불화가 묵직하고 단아한 느낌이라면 조선불화는 선명하고 화려한 느낌이다. 기산의 풍속도도 서양의 안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이를 통해 그 시대의 다양한 색감을 볼 수 있다. 또한 한 화가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서양 안료의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다양한 색을 쉽게 접하면서 그림을 다량으로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량 생산된 그의 그림을 두고 흥미로운 의견이 돌고 있다. 전문가에 의하면 기산 김준근의 작품은 한 명이 아닌 두 명 이상의 화가가 제작한 것이며, 그림 역시 하나의 기초 그림을 응용해서 다른 작품들을 다량으로 쉽게 만들었다는 의견이다.

 

 

 

 

 

 

 

 

 

 

기산 김준근의 작품속 인물 비교 부분도 @세계일보, 2020.06.16 강구열기자

 

 

 

 

 

 

 

 

 

 

 

실제로 세계 곳곳에 흩어진 그의 그림들을 바라보면 인물의 표현이 다르다. 유독 이마를 크게 그리거나, 눈매를 길게 빼는 등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이 있다. 그가 작품에 남긴 인장과 글자의 모양도 예로 들지만, 대표적으로 안 닮은 그림이 '기산'의 이름으로 퍼져나가 있다. 

 

 

 

 

 

이에 기산 김준근이 당시에 대량생산을 위해 공방을 두고 작업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많은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여러 명의 평민 화가가 그의 공방으로 모였다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구도의 그림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의 기초 그림을 바탕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형태의 본을 뜬 하나의 기초 그림을 좌우로 바꾸거나 배경을 더해서 여러 장의 상황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가 '기산'이라는 이름을 걸고 공방을 운영했거나, 기초 그림을 두고 작업을 했던 것은 추측이지만 확실한 건 많은 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개항장에서 가장 인기 있던 그의 작품은 마치 여행에서 엽서를 사듯 많은 외국인들에게 단연 인기였고, 그 결과 해외로 널리 퍼져서 알려진 작품 수만 해도 약 1600여 점이 되었다. 

 

 

 

 

 

 

 

 

 

 

 

 

 

기산 김준근 <빨래하는 모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당시 하늘을 찌르던 기산 김준근의 인기는 사진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잊히게 되었다. 현장에서 사진으로 생생하게 찍으면서 풍속도가 풍속사진으로 대체된 것이다. 사진기가 도입되었음에도 사진으로 쉽게 담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모습이나 민중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식을 줄 몰랐던 인기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기산 김준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혹자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며 삼류 화가로 칭하기도 한다. 어떠한 정보도 없는 일반 평민 화가 그린 삽화라는 의견도 있다. 그의 그림을 저평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산 김준근은 재조명되는 조선의 화가이다. 세밀한 묘사로 화폭에 담은 조선의 정신과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오늘날 여러 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더해서 1895년 국내 최초로 번역된 서양문학작품 조선어 판 『텬로력뎡(天路歷程)』(1895) 삽화를 그렸을 정도로 실력으로써 인정받은 화가라는 의견이 대세이다. 텬로력뎡(천로역정)을 통해 그가 보여준 '조선 식의 해석'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기산 김준근을 두고 후대의 우리가 어떠한 평가를 내리건, 그는 조선의 풍경을 그림으로 세계에 알렸다. 동시에 전 세계의 많은 미술관과 외국인 소장자를 두고 있으니 그의 인기에 대해선 반박할 수 없다. 오늘날 그를 두고 '한류의 원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화가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아직도 그의 작품은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 어떠한 작품들이 깜짝 선물처럼 공개될지 K한류의 바람을 타고 함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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