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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 Spoon

이중섭의 작품 ‘소’빼고 보기

2020.10.25

 

 

 

 

 

 

 

 

 

뜨거운 영혼을 가진 화가, 이중섭

 

 

 

 

 

 

 

 

 


 

 

 

 

 

 

 

 

 

 

'이중섭'은 오늘날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아무리 미술이 낯선 이라도 '이중섭'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는 민족적이고 향토적인 작품을 주로 남겼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비운의 천재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좌)이중섭 @한국학중앙연구원, 우) 이중섭의 <황소> (1953년 경)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동물은 무엇일까?

 

 

 

 

바로 ''이다. 

 

 

 

 

 

혹여 이중섭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그의 소 그림은 한 번쯤은 봤을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소'를 해석하는 이야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중섭은 ‘소’만 그렸을까. '소'는 그의 소재 중 하나일 뿐이다. 이중섭은 소 외에도 꽃, 닭, 풍경, 그리고 가족까지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그렸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소재였고 작품 속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소'의 화가로 알려진 이중섭의, 소를 '제외'한 다른 그림들을 보려고 한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고무엇이 그에게 주변을 그리게 했는지그가 그림으로 담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지 함께 알아보자.

 

 

 

 

 

 

 

 

 

 

 

 

 

 

 

이중섭 <닭과 게>

 

 

 

 

 

 

 

 

 

 

 

 

 

이중섭을 두고 불운한, 비운의 천재화가라는 칭호를 종종 쓴다. 마치 전래동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그의 삶(중 유독 부각된 면만)을 들으면 그의 칭호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쩜 그렇게 힘들었을지, '그럼에도 그림을 그린' 천재화가의 이야기에 안타까움과 경외심이 든다. 그는 분명 천재화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린 대단한 예술가가 맞다. 그런데 그의 삶 전체가 마냥 힘들고 슬프기만 했을까? 

 

 

 

 

 

그건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난으로 힘들어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는 오히려 부잣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떠나 보내야 했지만, 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는데 학업보다 그림에 더 열중할 정도였다. 주변의 모든 것은 그의 소재가 되었다. 소는 그 중에서 많이 그린 소재였다. 학교 주변에 소가 많았는데, 그는 소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여러 장의 습작으로 남길 정도로 수 차례 그렸다.

 

 

 

 

 

 

 

 

 

 

 

 

 

 

 

이중섭의 1941년 작, 좌) <발을 치료하는 남자>, 우) <나뭇잎을 따주는 남자>

 

 

 

 

 

 

 

 

 

 

 

그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건 스승에 의해 권유 받은 일본 유학에서였다. 그는 형의 지원을 받아서 다른 화가들처럼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만났듯, 그는 그곳에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일본 어느 그룹 계열사의 외동딸이었다.

 

 

 

 

 

이중섭이 그린 <발을 치료하는 남자>는 그녀의 발을 치료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 속 남성은 자신의 손에 피가 묻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한다. 오히려 그 발의 주인공이 어찌나 소중한지, 발을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조심스럽게 대하는 두 손에서 이러한 심경이 엿보인다. 그만큼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이는 당시 약 90여 장의 그림엽서를 보낼 정도였다.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1951년), 호암미술관

 

 

 

 

 

 

 

 

 

 

그러나 그 시기는 두 사람이 사랑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우선 둘은 한국인과 일본인이었고, 배경 또한 언제 전쟁으로 나라가 더 혼란스러울지 모를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태평양 전쟁이 격렬해졌다. 결국 이중섭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뒤이어 그의 연인인 마사코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둘은 혼례를 올렸고, 그는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애정이 담긴 이름이었다.

 

 

 

 

 

1950년, 나라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중섭에게는 어쩌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이주했다. 비록 모든 사정이 예전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과 가족이 함께하는 삶은 그에게 행복이었다. 

 

 

 

 

 

<서귀포의 환상>은 그 시절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중섭의 시그니처가 된 굵고 힘찬 터치는,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그림의 분위기를 더해준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하다. 그 어떤 고난도 쉽게 올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표현대로 '환상'적이다.

 

 

 

 

 

 

 

 

 

 

 

 

 

 

이중섭  <도원> (1953년)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 여기서부터가 우리가 잘 아는 이중섭의 슬픈 이야기의 시작일 것이다. 1952년, 그의 어려움은 일본에 있던 처가에 먼저 들이닥쳤다. 장인의 죽음으로 인해 처가의 지원이 끊기면서 였다. 두 아이를 키우기에는 처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더해서 아이와 아내의 건강도 좋지 않게 되었다. 이중섭의 가세도 기울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당장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위해 잠시 동안의 이별을 선택했다. 비록 그 자신은 당장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서 따라갈 수 없었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에서라도 잘 지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중섭의 <도원>은 그의 가족이 무릉도원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전에 보았던 <서귀포의 환상>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오히려 <도원> 속의 세계가 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네 명의 철부지로 보이는 아이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나체로 나무를 타고, 과일을 따고 있다. 어떤 아이는 숨바꼭질을 하는 듯하고, 또 다른 아이는 무언가에 홀딱 빠져있다. 그들이 있는 나무와 산, 하늘과 바다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서 아이들을 감싸는 듯하다. 여전히 색감은 따뜻하고, 선은 더 강렬해졌다. 그는 가족을 보내고 난 후에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림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길 떠나는 가족>도 그림 자체로는 참 경쾌한 작품이다. 소를 이끄는 아빠와 그 위에서 흥겨운 모습의 가족들에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소를 장식한 붉은 꽃은 그들의 꽃 길을 안내하는듯하고, 아이의 손에서 날 준비를 하는 흰 새는 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소식을 전해줄 것 같다. 이중섭은 이들을 굵직한 선으로 표현했는데 불분명한 형태보다 밝고 흥겨운 동작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이 더 돋보인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가족, 따뜻함, 그리움과 외로움의 내면을 표현했다. 온 가족이 만나서 함께하는 모습, 어쩌면 화가 이중섭이 아빠와 인간으로서 오랜 시간 가장 바라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상과 추상의 사이에서 표현한 <길 떠나는 가족>도 이중섭에게 참 이상적인 그림이다. 

 

 

 

 

 

 

 

 

 

 

 

 

 

 

 

이중섭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비록 모든 상황이 그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이중섭은 늘 새로운 재료와 시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전쟁 속에서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에 매달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 중 하나가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였다.

 

 

 

 

이중섭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종이를 구할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당시 담뱃갑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이가 버린 것으로만 그렸다고 하기에는 그 양도 방대했다. 따라서 그가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건 단순하게 '가난해서'라기보다는 '도전'과 '열정'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선이다. 혼란스러운 전쟁 속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중섭 <해와 아이들> (1952~1953년 경)​​​​​​​

 

 

 

 

 

 

 

 

 

 

 

 

 

 

이중섭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화가로서 성공해서 그 돈으로 일본을 가는 것이었다. 이에 1955년, 그는 전시회에 몰두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던 건 그에게 그림과 술뿐이었다. 

 

 

 

 

 

그렇게 개인전이 열렸고, 45점 중 약 26점이 팔리게 된다. 반 이상이 팔렸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시 대학교수의 석 달치 월급이라니, 성공적인 전시인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행복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을 외상으로 구매했고, 이마저도 작품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좌절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 연 전시는 좋은 판매 기록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더 깊은 방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유일하게 삶에서 바라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 더 멀어진 것이다.

 

 

 

 

 

 

 

 

 

 

 

 

 

 

" 인생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

 

                                         -이중섭

 

 

 

 

 

 

 

 

 

 

 

 

 

 

남은 힘까지 끌어올려서 불타 올랐기에, 그에게는 다시 올라갈 힘이 없었다. 

이후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치료를 병행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오늘날 명성과는 너무 다를 정도로, 그의 마지막은 무연고자로 분류되어서 3일 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이를 뒤늦게 안 그의 지인들로 인해 비로소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아내의 곁으로 보내졌다.

 

 

 

 

 

이중섭은 분명 안타깝고, 또 안쓰러운 예술가였다. 그가 바라는 건 그림을 그리며 가족과 함께하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삶을 희망했다. 그래서 그의 불행한 사연들이 오늘날에 더 안타깝게 부각된다. 그러나 안쓰러운 삶만 바라보기엔 그는 열정 있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도전할 줄 아는 작가였다. ‘소’를 그린 작품들을 제외한 다른 그림들을 통해 그의 이면을 설명하고 싶던 이유다. 이미 이중섭은 이중섭이다. 그의 열정적인 삶과 정신,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을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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